다툼이 길어지면 우리는 상대가 한 말보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네가 두려워서 그래”, “싫은 게 아니라 상처받지 않으려고 피하는 거야”, “과거에 그런 일이 있어서 지금 화난 거지.” 오랜 시간 지켜본 사람의 짐작은 꽤 정확할 수 있고, 본인도 몰랐던 마음을 알아차리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해석에는 위험이 있다.
상대를 왜 그런지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그가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지에는 답하지 않게 된다. 다른 판단은 불안으로, 거절은 회피로, 새 방향은 일시적 반응으로 바뀐다. 말은 들렸지만 그대로 설 자리를 얻지 못한다. 내 해석을 통과해야만 그 말의 진짜 뜻이 결정된다.
문제는 해석 자체가 아니라 해석이 차지하는 자리다. “내가 보기에는 이런 두려움도 있는 것 같은데 네 경험과 맞아?”라는 말은 하나의 가능성을 건넨다. “네가 내 해석에 반대하는 것 자체가 내가 맞다는 증거야”라는 말은 모든 출구를 닫는다. 상대의 설명으로 수정될 수 없는 해석은 이해가 아니라 대신 말하기가 된다.
상대가 자신에 대해 하는 말을 무조건 믿으라는 뜻은 아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을 잘못 알기도 하고, 불편한 동기를 그럴듯한 이유로 가리기도 한다. 모순을 짚고 행동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그의 말을 처음부터 증상이거나 변명으로만 취급해서는 안 된다. 한때 자신을 잘못 이해했다는 이유로 앞으로 자기 설명을 할 자격까지 잃는 사람은 없다.
존중은 한 문장을 잠시 그 모습 그대로 세워 두는 데서 시작한다. “원하지 않아”라고 하면 두려움을 분석하기 전에 그 거절을 먼저 만난다. “그 일이 나를 다치게 했어”라고 하면 과거 경험 탓을 하기 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살핀다. “나는 달라졌어”라고 하면 말 한마디로 믿지는 않더라도, 새 행동이 나올 가능성을 예전 이야기 속에 바로 가두지 않는다.
이 일은 어렵다. 해석은 확실함을 주고, 확실함은 다음 행동을 쉽게 만든다. 왜 그러는지 안다고 생각하면 달래거나 설득하거나 거절을 우회할 수 있다. 반대로 내 이해가 불완전하다고 인정하면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을 마주해야 한다. 친밀함은 이 불확실성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함께 견디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좋은 해석은 대화를 넓힌다. 내가 본 반복을 말하되 질문의 형태로 내놓고, 상대의 답이 내 생각을 바꿀 수 있게 한다. 상대를 대신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를 포기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가진 가장 좋은 이해보다도 눈앞의 사람이 언제나 조금 더 클 수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