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 / 108 ·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메를로퐁티, 몸은 개념보다 먼저 안다
손은 벌써 컵으로 향하고 설명은 뒤따른다. 익숙한 동작과 환상지에서 세계의 살까지, 몸은 세계로 가는 차가 아니라 이미 세계에 있는 방식이다.
1. 손은 벌써 움직인다
컵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근육마다 명령을 보내고 손가락의 각도를 계산한 다음이 아니다. 익숙한 움직임은 이미 시작되었다. 머릿속에서 문장이 되기 전에 손이 나간다.
걸을 때도 한 걸음마다 힘과 각도를 계산하지 않는다. 다리는 이미 할 줄 안다.
자전거를 탈 때는 어떨까. 다음 글에서 폴라니도 쓸 사례다. 달리면서 근육 하나하나의 수축과 무게중심의 이동을 빠짐없이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몸은 설명이 따라잡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
몸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만나는 방식이다. 내가 곧 내 몸이라는 말은 사람을 장기의 집합으로 줄이지 않는다. 살로 만든 조종석에 의식이라는 승객이 앉아 있다는 그림을 거부한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먼저 내가 된 뒤 몸을 지급받은 것이 아니다.
2. 설명하기 전부터 세계에 있다
1945년,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을 출간한다.
몸이 철학의 질문 한가운데로 들어온다.
우리는 안쪽의 의식, 바깥의 세계, 둘 사이에서 소식을 전하는 몸을 상상하기 쉽다. 이 단순화된 데카르트적 그림은 나는 생각한다를 앞에 둔다. 그러나 데카르트도 심신의 결합을 논했다. 그 이전에는 아무도 몸을 진지하게 보지 않았다는 철학사는 옳지 않다.
메를로퐁티는 나는 할 수 있다로 시선을 옮긴다. 세세히 반성하기 전에 몸은 사물로 향하고 장애물을 피하며 습관을 만든다. 나는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입문용 의역이지 정확한 인용문은 아니다. 어떤 능력이 있어야 존재할 자격을 얻는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아기는 세계에 관한 이론을 말하지 못해도 입과 손과 자세로 주변과 관계한다. 아기가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앎은 자신을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어떤 능력을 잃은 사람도 세계와의 관계 자체를 잃는 것은 아니다.
3. 없어진 팔
그의 유명한 분석 가운데 환상지가 있다.
팔을 절단했는데도 그 팔을 느낄 수 있다. 통증이나 손가락이 움직이는 느낌이 남기도 한다. 팔다리가 없다는 사실이 느낌까지 가짜로 만들지는 않는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팔이 없으니 통증은 상상이라는 말도, 절단했으니 생리적 기제가 관여할 수 없다는 말도 틀린다. 신경계는 남아 있고 생리학과 심리학 연구에는 각자의 몫이 있다. 메를로퐁티는 살아가는 몸을 부품 목록으로, 경험을 머릿속 영상으로만 설명할 때 놓치는 것을 묻는다.
잡고 들고 만지며 살아온 삶은 수술 순간에 지워지지 않는다. 컵은 여전히 예전에 가능했던 손짓을 부를 수 있다. 신체도식은 그런 습관적 방향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신비한 투사로 의학적 설명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신체도식은 움직이기 전에 펴 보는 해부도가 아니다. 팔의 정확한 길이는 몰라도 무엇에 닿는지는 안다. 다리를 재지 않아도 평소 넘을 수 있는 틈을 안다. 감각과 자세와 행동이 하나의 조직을 이루며, 부상이나 학습, 도구 사용으로 그 조직도 바뀔 수 있다.
몸은 달라졌지만 세계를 향하던 습관이 같은 순간에 바뀌지는 않을 수 있다. 하드웨어는 사라지고 소프트웨어는 남았다는 말은 이해하려던 분할을 다시 만들어 낼 뿐이다.
4. 다시 옥수수 곁으로
앞에서 만난 매클린톡을 떠올려 보자. 옥수수에 익숙하다는 것은 자료표를 외운다는 뜻이 아니었다. 관찰과 실험과 돌봄 속에서 자란 분별력이었다. 유기체에 대한 느낌은 움직이는 유전자를 초감각으로 포착하는 능력이 아니었다.
메를로퐁티는 그 실천을 읽을 언어를 준다. 그녀의 발견이 그의 철학에 의존했다는 뜻은 아니다.
현미경을 보고 수분을 돕고 이상한 점을 알아챈다. 모두 배워야 하는 동작이다. 눈과 손은 세부 명령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말단만이 아니다. 훈련된 한 사람이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는 판단에 몸으로 참여한다.
그 감각은 뇌의 반대편에 있지 않다. 육십 년이 다 끝나야 일어나는 신비한 압축도 아니다. 오랜 경험은 유전 분석, 세포학적 증거와 함께 일했다. 경험은 세부를 도드라지게 했고 증거는 예감에 검증을 요구했다.
때로는 손의 자세가 달라지고 눈길이 멈춘 뒤 설명이 뒤따라온다.
피히테를 옆에 두면 질문이 더해진다. 능동적인 나는 구체적인 몸으로 어떻게 사는가. 피히테를 지우거나 그에게 신체론이 없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정립과 활동에서 자세, 습관, 상황으로 초점을 가까이 옮기는 것이다. 세 길은 만나지만 하나가 되지 않는다.
5. 생각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세계
세계를 토론의 대상으로 삼기 전부터 우리는 그 안에서 살고 있다. 『지각의 현상학』으로 들어가는 한 입구다. 세계는 생각되는 것만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기도 하다.
어디에도 없는 자리에서 보지 않는다. 몸은 여기 있고 눈은 저쪽을 향하며 뒤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지난다. 후기의 메를로퐁티는 얽힘, 교차라는 말로 지각하는 것과 지각되는 것의 관계를 더 깊이 묻는다.
왼손이 오른손을 만진다. 오른손은 만져질 수 있고 다시 만지는 쪽이 될 수도 있다. 보는 나는 보이는 세계에 속한다. 그러나 두 자리가 완전히 겹치지는 않으며 탁자가 눈을 달고 나를 보는 것도 아니다. 얽힘은 간격을 남긴다. 가역성은 동일성이 아니다.
나가르주나와 나란히 읽을 수는 있지만 둘이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할 수는 없다. 자성에 대한 비판과 현상학적 얽힘은 물음과 논증이 다르다.
살, la chair라는 말은 하나의 존재 방식을 더듬는다. 근육만을 뜻하지도 않고 만물 뒤에 숨은 거대한 몸도 아니다. 지각하는 것과 감각되는 것이 서로를 삼키지 않으면서 함께 얽혀 있다.
공과 살은 독서 속에서 만날 수 있다. 같다고 서둘러 선언하기보다 서로 비추게 하는 편이 더 흥미롭다.
6. 몸이 대화에 들어온다
콩트가 관찰을 중시했다면 메를로퐁티는 더 묻게 한다. 관찰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현미경 앞에는 장소 없는 의식이 아니라 배우고 피곤해지는 몸이 있다. 질문을 보태는 것이지 콩트가 관찰자를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단정은 아니다.
피히테가 활동을 묻는다면 메를로퐁티는 화면을 가까이 당긴다. 이 나는 어떻게 손을 뻗고 돌아서고 방에 들어가는가. 철학의 일인칭이 생활의 자세와 습관을 얻는다.
베유는 소유하려는 자아를 조용히 하려 했지 몸을 없애려 하지 않았다. 남에게 주의를 기울일 때도 숨을 쉬고 피곤해지며 다가가거나 물러난다. 습관은 변하거나 사라질 수 있다. 그래도 주의는 몸 없는 시선이 아니다.
스트로슨은 두 부품으로 사람을 개념적으로 조립하기를 거부하고, 메를로퐁티는 몸의 경험을 묻는다. 이웃한 입구지만 두 사람의 완전한 동의를 지어낼 필요는 없다.
비고츠키는 발달에 공동 활동을 가져온다. 걸음마하는 아이의 손을 잡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몸의 협력이다. 말과 몸짓과 도구도 학습을 돕는다. 훗날 연구자들이 비계라고 부른 지원은 추상적 설명만도, 몸을 끄는 일만도 아니다.
7. 거기에는 다시 데카르트의 책이
1961년 5월 3일, 메를로퐁티는 쉰세 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널리 알려진 전기적 서술은 마지막으로 일하던 책상에 펼쳐진 데카르트 책을 놓는다. 이 의미 있는 장면은 남기되 사인이나 다음 날 강의의 세부까지 확정된 사실로 쓰지는 않자.
어떤 책이었을까.
보통 『굴절광학』으로 전해진다.
평생 데카르트와 논쟁한 사람이 여전히 데카르트를 읽고 있었다. 죽음이 어느 철학을 증명해서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의견이 다르기에 평생 이어지는 대화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클로드 르포르는 미완의 원고와 작업 노트를 정리해 1964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출간했다. 아렌트도 훗날 판단에 관한 미완의 작업을 남긴다. 두 중단을 함께 읽을 수는 있지만, 쓰지 못한 책에 가장 중요한 사상이 있었을 것이라고 대신 단정할 수는 없다.
미완의 책 가운데는 질문을 닫지 않고 더 자랄 자리를 남기는 책이 있다.
8. 다리 어귀에서
우리의 허구적 다리에 메를로퐁티가 온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걷는 방식이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걸음마다 따로 명령을 기다리는 것 같지 않다. 팔이 자연스럽게 따라 움직이고 발끝을 뚫어지게 보지 않는다. 몸은 바닥을 안다.
다리 위로 오른다.
스트로슨이 다시 보이게 한 바닥이 있다. 사람은 몸과 마음의 조립품이 아니었다. 그는 다가가 발로 판자를 느껴 본다.
눈으로만이 아니라 발로.
질감, 단단함, 약간의 탄력. 그것들이 경험에 들어오려면 먼저 명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옥수수에 몸을 숙인 매클린톡이 보인다. 얼굴보다 연구 대상과 맺는 몸의 관계를 알아본다. 현미경을 향한 자세는 추상적인 관찰자와 사물이 아니라 한 생명이 다른 생명에 관여하는 모습이다.
피히테가 틈 곁에 있다. 그도 옆에 선다. 말하지 않는다. 가장자리는 그의 선 자세 안에도, 발바닥이 느끼는 것 안에도 있다.
평범한 자리를 고른다. 몸 전체로 그곳에 있다.
세계는 생각하는 것만이 아니다. 살아가는 것이다.
바람은 개념이 되기 전에 피부를 만진다. 다른 사람의 발걸음이 판자를 통해 작은 진동으로 발바닥에 닿는다. 기온이 달라지고 해가 낮아진다.
하나씩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아도 이미 삶에 들어와 있다.
그는 서 있다. 세계가 그를 만지고 그는 세계 안에 있다.
경계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경계가 우리를 세계 밖으로 추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읽기 안내와 출처
『지각의 현상학』(1945)의 몸 관련 장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1964, 르포르 편)을 참고했다. 나는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의역이다. 몸의 경험은 신경생리학을 부정하지 않으며 얽힘은 완전한 일치가 아니다.
콜레주 드 프랑스 자료로 1908년 3월 14일 출생, 1961년 5월 3일 사망을 확인했다. 책상 위 『굴절광학』은 전해지는 장면이며 사인이나 마지막 수업의 증거로 삼지 않는다. 매클린톡의 실험은 노벨 강연을 참고했다.
바닥과 다리의 만남, 몸짓과 대화는 문학적 상상이다. 비교와 SAE와의 연결은 저자의 읽기이지 역사적 만남, 정확한 인용, 사상의 동일성 증명이 아니다. 개념 하나로 한 사람에게 최종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Merleau-Ponty — Phenomenology of Perception (primary text) · Merleau-Ponty — Le Visible et l’Invisible (primary text) · Collège de France — Maurice Merleau-Ponty · Barbara McClintock — Nobel Lecture · SAE — Epistemology (author’s comparative background)
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