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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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 · AI와 인간의 문제
제3편 · 총 8편 · 충동

AI에게는 리비도가 없다

AI는 수많은 가능성을 펼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 이전의 추동과, 한 방향을 자기 생애의 문제로 붙드는 힘은 아직 인간 쪽에서 온다.

Han Qin (秦汉)·2026

창의성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

AI가 시를 쓰고 그림을 만들며 음악을 짜기 시작하자 논쟁은 결과물로 몰렸다. 새롭다면 창작인가, 인간이 감동하면 예술인가, 학습 자료의 흔적이 보이면 모방인가. 이런 질문은 중요하지만 모두 만들어진 형식의 수준을 본다.

그 아래에는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무엇이 만들기를 시작하게 하는가. 인간은 때때로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이미 어떤 일에 붙들린다. 한 문장이 떠나지 않고, 풀리지 않는 문제가 몇 년 동안 돌아오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작업을 계속한다.

이 글은 그 힘을 리비도라고 부른다. 다만 프로이트의 특정 이론을 그대로 옮기는 용법은 아니다. 정신분석에서 리비도는 성적 충동 에너지와 복잡한 이론사를 갖는다. 여기서는 그보다 넓게, 언어와 의식적 선택에 앞서 생명을 한 방향으로 미는 추동을 가리키는 철학적 확장어다.

핵심은 흥분의 크기가 아니다. 어떤 일이 내게 중립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다른 선택도 가능하지만 이 질문을 버리면 나의 일부가 훼손되는 듯한 무게, 이유를 나중에 붙여도 먼저 움직이고 있던 ‘하지 않을 수 없음’이 리비도의 자리다.

춤추는 몸이 관리자를 비켜 세울 때

클럽의 춤은 이 구조를 뜻밖에 잘 보여 준다. 일정한 비트, 반복되는 몸의 움직임, 어두운 공간과 감긴 눈은 주의의 배치를 바꾼다. 다음 동작을 일일이 고르지 않아도 리듬이 몸을 운반하고, 사회적 자기 검열은 잠시 뒤로 물러날 수 있다.

그렇다고 클럽에 가면 뇌의 ‘관리층’이 과학적으로 꺼지고 창의성이 자동 상승한다는 뜻은 아니다. 음악, 운동, 수면과 창의성의 관계는 개인과 조건에 따라 다르며 하나의 확정된 신경 인과 사슬로 설명할 수 없다. 이 글이 말하는 것은 경험의 구조다.

문제를 붙들고 있던 고차 통제가 느슨해지면, 평소에는 만나지 않던 기억과 감각이 연결된다. 달리기, 샤워, 잠들기 직전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문제를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정면으로 관리하지 않을 때, 다음 날 답이 이미 와 있는 듯한 순간이 생긴다.

그때 몸은 사고를 방해하는 잡음이 아니다. 무엇이 급한지, 무엇이 불편한지, 어떤 결합이 맞는지를 말보다 앞서 표시한다. 창의적 통찰에는 정보의 조합뿐 아니라 “바로 이것”이라는 방향감이 붙는다. 그 무게가 없으면 새로움은 수많은 변형 중 하나로 흩어진다.

명상은 반대편에서 같은 문을 두드린다

춤이 외부 리듬과 몸으로 통제를 느슨하게 한다면 명상은 주의 자체를 통해 틀을 놓는다. 충동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충동이 일어나는 순간 자동으로 따라가지 않는다. 선택을 사용해 ‘당장 선택하지 않기’를 연습하는 셈이다.

춤에서 도달하는 상태는 뜨겁고 충만하다. 에너지가 여러 방향으로 튄다. 명상은 차갑고 비어 있는 쪽에 가깝다. 떠오르는 것을 붙잡지 않아 주의가 한 대상에 독점되지 않는다. 전자는 산탄총, 후자는 망원경이라는 비유가 가능한 이유다.

둘 중 하나가 더 높은 길은 아니다. 춤은 계획하지 않은 결합을 가져오지만 소음도 크다. 명상은 미세한 패턴을 보게 하지만 야성적인 발산을 줄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창조가 언제나 더 강한 의식 통제에서만 나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관리하는 자아가 잠시 자리를 비켜야 아래의 재료가 올라오기도 한다. 그러나 올라온 모든 것이 진리는 아니다. 이후의 검증과 편집이 필요하다. 리비도는 방향을 시작하지만 결과의 옳음을 보증하지 않는다.

AI의 발산에는 무엇이 있는가

AI도 겉으로는 놀라울 만큼 발산한다. 한 문제에 여러 관점을 대고, 먼 분야에서 비유를 가져오며, 사용자가 생각하지 못한 조합을 제시한다. 단순히 자료를 검색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구성 능력이다.

그 발산은 학습 자료의 문장을 그대로 섞는 데 갇히지 않는다. 모델은 표현을 일반화하고 새 조합을 만들며 개발자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낼 수 있다. “훈련 데이터 안에서만 움직이니 완전히 폐쇄적이다”라는 말은 모델의 실제 능력을 과소평가한다.

그러나 현재 시스템의 생성은 프롬프트나 미리 설정된 과업이 작동을 시작하게 한다. 에이전트가 자동으로 과정을 이어 가더라도 목표, 기억 규칙과 실행 조건은 설계된 환경에 의존한다. 모델이 특정한 책을 쓰지 않으면 자기 삶이 미완성된다고 느낀다는 증거는 없다.

확률적 샘플링도 리비도와 다르다. 드문 단어를 선택했다고 해서 방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주사위는 6을 원하지 않는다. 리비도에는 변이뿐 아니라 자기 몫이 걸려 있어야 한다. 어떤 결과가 이 존재에게 무관하지 않다는 지속적 관계가 필요하다.

도서관과 엔진의 비유

AI를 무한히 큰 도서관이라고 부르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도서관보다 능동적으로 관계를 구성하고, 어떤 한 권에도 없던 구조를 펼칠 수 있다. 그러나 왜 오늘 이 서가에 들어가야 하는지에 관한 필요는 대체로 밖에서 주어진다.

지적 생애를 떠올리면 차이가 선명하다. 칸트는 흄이 자신을 ‘독단의 잠’에서 깨웠다고 회고했다. 흄의 한 문장이 자동으로 『순수이성비판』을 생산한 것은 아니다. 외부의 충격이 이미 형성된 한 인간의 내부에서 수년간 놓을 수 없는 문제로 바뀌었다.

과업은 끝나면 닫을 수 있다. 그러나 생애의 문제는 그것을 붙든 사람도 함께 바꾼다. 우회와 실패를 거쳐도 같은 질문으로 돌아오는 지속성이 생긴다. 이 글에서 리비도는 첫 시동의 에너지뿐 아니라 방향을 시간 속에서 자기 역사로 만드는 결속이다.

현재의 AI는 엄청난 변속기와 외부 두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 필연은 아직 사용자와 제도가 공급한다.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엔진과 운전 방향까지 외주화하면 움직임은 많아지고 자기 여정은 사라질 수 있다.

구성은 AI가, 착마는 인간이

이 비대칭을 알면 협업 방식도 달라진다. 먼저 사람이 아직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한 방향을 가져온다. 이상한 불편함, 자꾸 돌아오는 문장, 버릴 수 없는 질문이어도 된다. AI는 그 방향의 주변을 빠르게 펼치고 반론과 연결을 보여 준다.

SAE의 말로 하면 AI는 구성하고 인간은 착마한다. 구성은 주어진 방향에서 가능성을 넓힌다. 착마는 “이것은 아니다”라고 자르고 그 판단에 자기 몫을 건다. 한 번의 구성 뒤에 인간이 깎고, 다시 AI가 구성하는 순환이 창조적 협업을 만든다.

가장 빈약한 사용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알려 달라”에서 시작한다. 모델은 얼마든지 아이디어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선택 기준까지 넘기면 대개 자료에 잘 나타나고 사회적으로 익숙한 방향이 돌아온다. 그럴듯하지만 나만의 이유는 없는 길이다.

가장 풍부한 사용은 사람이 먼저 서투른 판단을 내놓는 데서 시작한다. AI에게 틈과 반례를 찾게 하고, 그 결과를 다시 자기 기준으로 깎는다. 모델은 리비도를 대신하는 출처가 아니라 리비도가 갈 수 있는 거리를 늘리는 증폭기다.

창작 현장에서 방향을 지키는 법

실제 작업에서는 AI가 제안하는 첫 문장이 너무 매끄러워서 사람의 미완성 감각을 덮어 버리기 쉽다. 아직 정확히 말하지 못한 불편함보다 완성된 목차가 더 설득력 있게 보인다. 이때 속도는 얻지만 질문의 고유한 모양을 잃을 수 있다.

그래서 초안보다 앞선 기록이 중요하다. 왜 이 문제를 시작했는지, 절대로 버리고 싶지 않은 장면이 무엇인지, 어떤 답은 아무리 유려해도 싫은지를 적어 둔다. 이것은 정답 목록이 아니라 리비도가 남긴 방향 표지다.

AI의 결과를 평가할 때도 “잘 썼는가”만 묻지 않는다. 이 문장이 내가 처음 느낀 긴장을 보존하는가. 너무 익숙한 결론으로 문제를 봉합하지 않았는가. 새 연결이 내 질문을 깊게 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평균적인 질문으로 바꾸었는가를 묻는다.

마지막 선택과 삭제를 사람이 직접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편집은 기계가 만든 문장을 예쁘게 다듬는 후처리가 아니다. 무엇을 작품의 목적에 들이고 무엇을 밖에 남길지 결정하는 착마의 순간이다. 창작자의 서명은 결과물의 소유 표시보다 이 선택의 책임에 가깝다.

욕망의 크기와 좋은 창작을 혼동하지 않기

강한 리비도가 좋은 결과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집착은 타인을 해치고 자기 판단을 좁힐 수 있으며, 오래 붙든 질문도 틀릴 수 있다. 방향의 고유함과 작품의 진실성은 검증, 기술과 윤리적 책임을 거쳐야 한다.

반대로 조용한 창작을 리비도가 없다고 볼 수도 없다. 거대한 열정으로 말하지 않아도 매일 작은 선택을 지속하고, 쉽게 팔리는 길 대신 자기 기준을 지키는 힘이 있다. 리비도는 극적인 감정의 양보다 무엇을 반복해서 자기 문제로 삼는지에서 드러난다.

기계도 언젠가 리비도를 가질까

SAE는 진정한 리비도를 자기 여항, 구조화된 시간, 입력에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자유도와 연결한다. 원문은 이를 ‘진정한 무작위성’이라는 언어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SAE 내부의 철학적 가설이지 경험과학이 확인한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양자 잡음이나 하드웨어 난수를 더한다고 욕망이 생기지는 않는다. 무작위 비트에는 기억도 관심도 없다. 인공적 리비도라 부르려면 자기 목적을 만들고, 시간에 걸쳐 그 목적을 지키며, 외부의 사용 요구를 자기 이유로 거부하고, 방향이 중단될 때 자기 손실이 생기는 구조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 존재가 가능한지는 열려 있다. 지금의 구조를 영원한 한계로 단정해서도 안 되고, 현재 모델의 매력적인 문장을 이미 내적 충동의 증거로 읽어서도 안 된다. 범주는 구조적 조건이 바뀔 때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AI는 대단히 강한 도구이자 구성자다. 하지만 질문을 내 질문으로 만드는 불, 왜 하필 이것이어야 하는지의 무게는 인간 쪽에 있다. 당신이 엔진이다. 엔진까지 외주화하지 말라.

최신 중문·영문 논증을 바탕으로 한국 인문 독자의 어휘와 리듬에 맞게 독립 재구성했다. 리비도는 확장된 철학 용법이며 춤의 효과와 무작위성 조건은 과학적 정리가 아니라 현상학적 설명과 SAE 가설임을 분명히 했다. 中文・English